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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 상호성, 등가성, 동시성의 문제
작성자 bangha
작성일 2015-10-24 (토) 12:12
   
관계 - 상호성, 등가성, 동시성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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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관계는 - 인간관계든 사회적 관계든 패권주의가 지배한다. 간명하게 약육강식의 관계다, 지배와 피지배, 약탈과 피탈의 관계다. 이른바 갑을(甲乙)의 관계다, 이런 관계를 이걸 다소 철학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잉여발생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잉여는 정치, 경제적 잉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야만과 무명(無明)이라는 사회문화적 잉여를 포함한다.

그러면 합리적 관계 내지 합법칙적 관계, 쉬운 말로 정상적인 관계 또는 건강한 관계는 어떤 것일까? 흔히 소통을 말하지만 소통이 일어날 수 없는 관계는 무잉여의 관계다. 잉여라는 불순물이 개입되면, 그렇게 회로가 오염되면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도체가 아니라 저항을 크게 만든 부전도체와 같은 거니까.

 

이하에서 관계의 세 측면을 보자,

첫째, 상호성이다. 극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관계는 상호적이고 쌍방향적이다, 일방적이라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주종관계, 갑을의 관계가 성립할 뿐이다. 그것은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상호적이라는 것은 피차 자발성을 전제한다. 자발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상호적 일 수 없다,

상호성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가령교욱을 예로 들자면, 서로가 마주하고 이야기한다고 상호성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학생들에게 집어넣고 길들이는 주입식 교육에서는 상호성은 없다, 그것은 일방통행일 뿐이다,

상호성이 성립하는 것은 대화체적 교육이다. 교사의 양심과 양식, 그리고 학생들의 양심과 양식이 상호교감할 때 그것을 대화체적 교육이라고 한다.

여기서 간과해서 안되는 것이 있다, 지식이나 지혜가 있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존재이고 배우는 학생은 은혜를 받는 존재이기만 할까? 만약 그러하다면 그 또한 상호성이 없다, 은혜를 베푸는 듯한 교육적 행위라면 교육이 아니다, 길들이기다,

그러나 사실은 교사가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교사의 지식이나 지혜, 그것이 필요한 곳으로 전해지지 못하고 자기 속에 가두어져 있다면 그 자체가 잉여이고 그것이 교사의 고통이다, (나의 관계를 고집하는 자에는 그런 고통이 없고 관계의 나라면 그런 고통이 동반한다) 그래서 교사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전해질 수 있는 관계에 서고자하는 것이다, 그 관계 속에서 잉여의 고통이 해소되고 행복할 수 있으니까,

반면 배우는 학생도 그렇다, 부족한 지식과 지혜를 배우면서 무지, 무식의 어리석음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러니까 교사와 학생의 교육적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다, 남아도는 지식과 지혜가 있는 교사에서 그것이 필요한 학생으로 전달되는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다, 지적 잉여가 해소되면서 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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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교사의 양심은 교사라는 개별자, 그 인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관계가 시야에 들어올 때, 그래서 지적 잉여를 자각할 때, 양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 2) 교사에 대한 보상은 무엇일까? 지적 잉여와 그로 인한 교사의 고통이 해소되는 소통, 그것이 보상이다, 학생들이 교사에 고맙지만 교사 또한 그 학생들에 고맙다. 교사가 그런 학생을 만나서 교육적 관계에서 소통할 수 있었던 거니까, 그 학생들이 아니라면 자신의 지식과 지혜가 그냥 사장될 수 있었던 것이지만 학생들을 만나서 생산성을 갖고 유용성을 발휘하게 해준 것이니까, 교사의 존재이유를 찾아준 것이니까 학생들이 고마운 것이다,

(* 3) 교사의 지식과 지혜는 본래 교사의 것이 아니다, 때문에 자신의 지식과 지혜에 대해서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것을 소용하는 자에게 전달되어져야 가치는 갖는다, 자신에 가두어두고 그 흐름과 소통을 막는다면, 잉여를 발생시키면 그 자체가 죄업이다. 그래서 그 전달에 헌신적이어야 한다, 그점에서 교사는 교육의 미디어다, 그것이 진짜 소설미디어(social media).


둘째, 등가성의 측면이다. ‘가 동등한 지평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등가적이지 않으면 관계는 왜곡된다. 우열관계로 굴절되고, 주종관계로 틀어진다,

도레미파솔라시도, 그 어느 음이 더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것이 아나다. 각자 고유한 소리를 내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화음을 만든다. 7개의 음은 다 등가적이다,

인간도 그렇다, 잘 난 인간, 못 난 인간을 가르지만 나도 눈이 두 개이고 코가 하나이고, 너도 눈이 두 개이고 코가 하나다, 다 오장육부를 갖고 있다, 부처도 마찬가지다, 부처라고 눈이 세계이고 팔이 다섯 개이고 오장칠부인 것이 아니다, 그점에서 인간성은 등가적이다,

다시 교육을 예로 들면, 먼저 지식과 지혜를 습득했건, 뒤에 습득하게 될 학생(後生)이건 인간으로서 등가적이다, 상호 등가적이니까 교육적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선생도 처음부터 유식한 것 아니고 학생도 배우면 무식한 것이 아니니까, 교육이 성립하는 것이다, 가르치고 배워도 무식과 무지를 탈출할 수 없다면(그런 인간은 없다), 교육적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셋째, 동시성(同時性)이다. 동시성이 없다면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송신과 수신이 동시적이라야 한다는 거다,

인체를 보아도 그렇다, 눈이 장애물을 간파했으면 즉각 신경계로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접수한 다리는 발을 옮겨디딘다. 그게 동시적이지 않고 시차가 생기면, 1분 뒤에 명령을 접수하고 10분 뒤에 명령을 접수하면 인간은 무사할 수가 없다, 인체의 신호전달체계는, 그 송수신은 동시적이다, 그러니까 동시성을 지닐 때, 관계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관계고 병든 관계이고 바이러스에 오염된 관계다,

동시성이란 것은 이런 면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서로의 시간이 불일치하는 것, 그래서 타이밍을 놓치는 것이다. 가령 애정고백을 하고 청혼할 때, 그 때를 놓치면 성급해도 놓치고 뭉기적 거려도 놓친다 -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뒤 늦게 후회를 한다, 아이를 꾸중할 때도 타이밍이다, 시도 때도 없이 공부하라고 하면 잔소리만 되고 전혀 교육적 가치가 없다, 오히려 관계를 피로하게 만든다, 아이도 늙어서야 그때 부모말을 잘 들을 걸,,,그렇게 된다,

또 다른 경우를 보자, 가령 지금 이 자리에 같이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해도 동시적이지 않다, 한 사람은 과거의 상처를 들추고 있고 상대방은 현재를 이야기하면, 그렇게 시차가 나면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실제 현실의 인간은 같은 자리에 있어도 각자 다른 시간에서 놀고 있다, 이렇게 시간을 놓치고 시차가 발생하는 것, 무언가의 오염물질, 이를테면 욕심이나 과욕이나 자기 계산이나 이런 것들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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